네.
요즘 세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제 대학시절 땐,
연극영화과 군기가,
제법, 심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연극과 영화는,
' 종합 예술 ' 이기 이전에,
' 약속 예술 ' 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100명의 스태프가 다 모였는데,
주인공,
단 한 사람만 안 와도,
영화를 찍을 수 없으며,
똑같은 연유로,
연극도,
공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평소,
약속 시간에 대한 긴장감을 위해,
선후배간의 군기가,
존재했던 것이죠.
그랬기 때문에,
제가 복학생 2학년일 때,
전 학년 연합 MT 가던 날,
한 후배님을,
세심히, 살피게 된 것입니다.
그 후배 분은,
나이가 저보다,
7살이나 더 많았지요.
이름은 창식(가명)인데,
비교적 늦은 나이에,
영화에 대한 열정과 꿈을 품고,
입학했습니다.
그러나,
서두에 말씀드린,
연극영화과의 군기로 말미암아,
잔뜩,
움츠러들 수밖엔 없었죠.
해서,
행여나,
나이 어린 선배들에게,
조금이라도 험한 꼴을 당하실까봐,
MT 가는 전세 버스 안에서,
저는 그 후배님 옆에,
앉게 되었던, 것입니다.
버스는 목적지를 향해 출발했고,
조금씩 긴장감이 풀리면서,
창식 후배님은,
제게 말을 건넸습니다.
' 바냐 선배님.
그래도 MT를 가게 되니까,
기분이 좋네요... '
' 창식님.
아니, 형님이라고 부를게요. '
' 형님이라니요?
하늘같은 선배님이신데요. '
' 하하.
저희 둘이 있을 땐,
제가 형님으로 모셔야죠.
삼강오륜이,
물구나무 설 순 없잖아요. '
' 고마워요, 바냐 선배. '
' 그건 그렇고,
좀 전에 말씀은 무슨 뜻이세요?
MT를 가니까,
기분이 좋으신 건 알겠는데,
무슨...
안 좋은 일이 있으세요? '
' 아... 네.
그게...
아닙니다.
뭐, 제 개인사정인데요 모. '
대성리로 가는,
전세 버스는,
그렇게 경춘 국도를,
계속 내달리고 있었습니다.
2,30분간,
서로가 침묵하며,
이런저런 군것질을 하다가,
다시,
창식 후배 형님이,
입을 열었죠.
' 사실은 저...
집에 일이 있어서요.
부모님께서...
헤어지시려 해요.
전 그게...
너무 힘들고요... '
' 아...
그러셨구나... 형님. '
' 제 성격이,
바냐 선배처럼,
유쾌한 편이 아니라서,
많이... 비관적인 상황이에요...
그래도,
이렇게 바깥바람을 쐬니까,
좀 살 것 같네요... '
' 아... 형님.
그렇게 쉬운 얘기가 아닌데,
저 같은 어린 동생에게...
속 깊은 말씀을 주셔서...
뭔지,
제가 죄송한 것 같아요... '
' 아, 아닙니다.
제가,
바냐 선배가 좋아서 하는 얘긴걸요.
또 오늘 이렇게,
편안하게 가게 될지는 몰랐어요.
다,
바냐 선배 덕분이에요. '
네.
그렇게,
그 후배 형님과,
버스로 이동 중에,
두어 시간,
대화를 나눈 것이,
어떻게 보면,
인연의, 전부였습니다.
그 후론,
학교에서 오가며,
간단하게 인사만 했는데,
그 형님은 영화를,
저는 연극을 전공했기에,
교양과목 외에는,
딱히,
접점이 없었던 것이,
그 이유였죠.
그리고,
그 해,
여름이 왔습니다.
저는,
정기 공연 때문에,
연극 연습에 몰입해 있었고,
또,
제 연기 연습 스타일은,
밤샘이기 때문에,
올빼미형 인간으로,
변해있었죠.
그러니까,
오후 1시 기상,
오후 수업 종료 후,
오후 9시부터,
대략,
새벽 3시 정도까지,
맹연습을 하는,
야간형,
배우였죠.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 날은,
아주 묘한,
느낌이 지배하는,
이상한 날이었어요.
커피가 매우 달았는데,
자판기 커피라,
맛이,
크게 다를 수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커피 프림마저,
설탕처럼 느껴졌습니다.
연기 연습을 하면,
자판기 커피를,
오후에만,
기본 다섯 잔 이상 마시는데,
아무래도,
새벽에 잠이 올까봐,
카페인으로 보험을 드는 편이었죠.
밤,
12시 즈음이었습니다.
그땐,
여름 방학 중이어서,
예대 로비엔,
학생들이 많지 않았지요.
언제나 열심인,
미대 친구들이,
물감으로 얼룩진 작업복을 입고,
잠시 자판기 커피를 마시고,
사라지곤 했지요.
저도,
로비 기둥을 둘러싼,
라운드형 소파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었습니다.
그날따라,
대사가 잘 안 되고,
제스처 연기도,
뭔가 많이 못 마땅해서,
답답했거든요.
그때였습니다.
아주 오랜 만에,
창식 후배,
아니,
창식 형님이,
로비에, 들어서는 것이었습니다.
또,
그 형님 뒤에는,
못 보던 사람들이,
두어 명 있었고요.
' 형!
창식이 형!
아니,
이 밤중에,
여긴 웬일이세요? '
창식이 형은,
뒤에 있는 두 분과,
잠시 뭐라고 이야기를 나누더군요.
그리곤 다시 저를 보고,
' 바냐 선배.
반가워요.
일이 있어서 왔어요. '
' 아니 형님.
형님네 팀이,
영화 찍고 있다는 소식은,
못 들었는데요.
이 밤중에, 학교엔 어쩐 일이세요? '
' 네, 바냐 선배.
떠나기 전에,
둘러보고 싶어서 왔어요. '
' 어디 가시는데요? '
' 아무튼,
바냐 선배가 무척 보고 싶었어요.
전 그럼, 갑니다.
잘 계세요. '
' 네, 형님.
그럼 조심히, 잘 가세요. '
바로,
그 때,
전,
손이 뜨거웠습니다.
' 앗 뜨거 ! '
손에 들고 있던,
자판기 밀크 커피가,
제 손을 떠나면서,
제 무릎을, 적셨거든요.
창식이 형님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 이상하다.
분명 저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는데.
앗 !
아니야 !
그게 아니잖아 ! '
네.
그제야 전,
자판기 커피를 뽑고,
소파에 앉자마자,
잠들었음을, 깨달았습니다.
무릎에서,
모락모락 김이 나는,
쏟아진 밀크 커피가,
그 증거였죠.
그렇습니다.
분명 저는, 잠들었는데,
어떻게,
창식이 형님을 만나,
대화를 나누게 된 건지,
의아했습니다.
그리고,
아침이,
밝아왔습니다.
극장 객석에서,
쪽잠이 들었는데,
저희 과 조교 선배가,
다른 후배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
들려왔습니다.
' 어젯밤, 창식 씨가 자살했댄다. '
p.s.
네.
그 후,
그 형님의,
자살에 대한 소식 중에,
부모님 문제 때문이라는,
출처 불명의 이야기가,
학과 내에서,
돌았습니다.
시간상,
그 형님이,
스스로 목숨을 끊으신 후,
저를 찾아,
그 밤중에,
학교에 왔던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제 영적 능력이 각성된 후,
창식 형님 뒤에,
어설픈 학생 복장을 하고 있던,
두 남자는,
죽음천사임을, 알게 됐습니다.
제가,
죽은 자와,
처음으로 대화를 나눈 건,
24살, 여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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